아직도 미스테리라는 한국 역사 ㄷㄷ
작성자 정보
- 멍멍몬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 384 조회
- 10 댓글
- 목록
본문
백번양보해서 만주쪽이야 원래 숙진계열 말갈/여진의 본거지니 그렇다쳐도 예맥계열의 한반도 함경도쪽의 발해인들에게 대체 무슨일이 일어났기에 발해계는 싹다 증발하고 여진의 영토가 되었을까?
.
가이드 안내: 온라인카지노
관련자료
-
이전
-
다음
댓글 10
북북춤할아버지님의 댓글
- 북북춤할아버지
- 작성일
수도 어택땅 하고 할거 하고 철군 했는데알고보니 나라가 망했는데 거란은 몰랐고 여진족이 이를 알고 꿀꺽한게 아닌지
hiw님의 댓글
- hiw
- 작성일
발해 멸망 - 금나라 사이에 시간이 200년 차이나고 그 사이에 발해부흥운동으로 일어난 후계국가가 7개국(대부분 몇달이지만)에 그중 2개국은 어찌저찌 몇십년 해먹었으니...걍 열심히 부흥운동하다가 아예 먹혀버린거 아닐까 싶긴 함
은혜를뭔수로갚아님의 댓글
- 은혜를뭔수로갚아
- 작성일
그래서 발해 부흥운동들 일어났잖아
잿더미에서부활한참새님의 댓글
- 잿더미에서부활한참새
- 작성일
역사를 인터넷으로 배웠으니 저런 망상이나 하지지도 표시 부분들은 개마고원 장백산맥 함경산맥 마천령산맥현대까지도 인구가 거의 없는 미개발지임20세기에 질소비료법의 발명으로 농경한계선이 북상해서 사람이 살기 시작했을뿐애초 정주 인구가 없는데 뭔 행정구역을 나누고 통제를 함?심지어 강원도 화전민 인구등록도 1960~1970년대에나 가능했는데?그나마 거의 유일한 농경 가능 구역이 목단강 일대였으므로 용천부가 파괴된 것만으로 곧 국가전체가 파괴된 것과 같은 결과가 된거임
lllIIlllIII님의 댓글
- lllIIlllIII
- 작성일
지금 만주 인구가 1억인데 어떻게 옛 발해 땅을 보고 '현대까지도 인구가 거의 없는 지역' 이란 말을 할 수가 있냐;;'애초 정주 인구가 없다' 라는 말도 진짜 오버 많이 하는 말임.고구려 발해가 멀쩡하게 나라 만든 곳에 정주 인구가 없는게 말이 안되지.현재까지 발굴된 발해의 성곽과 도시, 마을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농기구 나옴(최진열,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농업 - 토지 비옥도와 인구·곡물 생산량의 관계를 중심으로』, 정석배, 『발해 마을유적 소고』)그리고 발해인들이 조,피,보리,밀 같은 작물 전파하며 연해주까지 농경 성공함(쌀보리는 말갈시기부터 발해시기까지 그리고 밀은 발해시기에 들어 조, 피 등과 더불어 당시 주민 들에게 있어 중요한 작물이었다. 연해주가 발해영역으로 편입된 후 기존 말갈시기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재배종이 나타나게 된다. 이를 역으로 생각하면 발해 중심부에 이와 같은 농업문화가 존재했기에 새롭게 편입시킨 연해주에도 새로운 종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발해시기 목단강․송화강 권역의 생태환경과 경제』)(발해시기에 진입 후에는 재배종이 대폭 증가한다. 종이 확실히 동정된 작물이 총 13종에 이르며, 이중 발해시기에 새롭게 보이는 것은 피, 겉보리, 밀, 팥, 완두, 메밀, 들깨, 대마 등이다. 다양한 작물마다 재배 조건이 달라서 이러한 종의 증가는 농업수준의 발달을 의미한다. 또, 아브리코스 주거지 출토 식물유체 중 작물의 비율이 63%에 이르고 기타 발해유적에서 발견된 식물유체 중 작물의 비율이 70%~90%를 차지한다는 사실 역시 농업수준의 발달을 다시 한번 입증해준다. 농업의 발달은 생산량 증대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발해유적에 있어 작물의 생산량이 증가했다는 것은 주거지 내부뿐만 아니라, 비주거 공간인 도로유구나, 주거지 사이 등의 공간에서도 식물유체가 출토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박규진 외, 『발해시기 농업의 전개와 성격』)어디까지? 북위 43도까지(-발해시기 농작물의 품종은 각 지대의 부동한 지세와 토양, 기후 등 조건에 따라 각기 달랐다. 기후가 따뜻하며 땅이 비옥한 남부와 중부의 부분적인 지대와 평원지대에서는 조, 벼, 콩을 주로 재배하였으며, 기후가 낮은 지대에서는 내한성이 강한 보리와 밀을 위주로 재배하였으며, 그 외에도 조, 콩, 피낫 등 조숙한 전작물을 심었다. (중략)기후가 찬 지대에서는 그 지대에 알맞는 내한성이 강한 농작물 품종인 보리, 조, 메기장을 위주로 한 양식작물을 많이 심었다. 기후가 따뜻하고 땅이 비옥하며 수원이 충족하고 관개에 편리한 남부와 중부의 평원지대에서는 벼를 재배하였다. 노성의 벼는 발해 농작물 가운데서도 유명한 농산품이다. (중략) 중경은 벼를 재배한 중요한 지대였다. 노성에서 벼를 재배했다는 사실은 우리 동북 고대사상에서의 위대한 창거이다. 698년 발해국이 건립되기 전 이 지대에서 벼를 재배한 사실이 이전에는 없었다. 과학기술이 발전하지 못한 그 시기의 벼에 재배기술을 북위 43도 안팎에 속하는 노주까지 전파하여 성공적으로 재배하였다는 사실은 기적이라 할 수 있다. 방학봉, 정음사, 『발해사연구』,)농사만 지은게 아니라 말, 돼지, 수산물도 풍부했고 유적에서도 매번 나옴.그냥 나오는게 아니라 발해 주요 수출품이었음.(발해 시기의 말 사육은 유물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러시아 연해주의 거의 모든 발해 유적에서 말 뼈가 발견되었다.(...)발해 때 막힐의 돼지가 유명하였던 것은 부여 이래 이 지방에서 돼지를 많이 기르고 있었던 사정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발해에서의 돼지 기르기는 육류 보장과 많이 관련되어 있었다. 러시아 연해주의 발해 유적에서 나오는 가축 뼈 가운데서 돼지 뼈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사료에서도 똑같이 나옴. 김육불, <발해국지장편> 제 17권 4항목 식화고-발해는 동북쪽에 치우쳐 있고, 그 땅이 바다에 잇닿아 있으며 기후는 몹시 춥다. 그러므로 사나운 새, 특이한 짐승, 무늬 있는 돌, 어류와 패류, 약재같은 것이 많이 난다.(중략) 수레와 말이 사방에 이르자, 곧 생산된 물품을 수레에 싣고 각국에 가서 쌀, 조, 포목, 비단 등을 바꾸어 국민들의 일용으로 소비하였다. 대개 나라를 세운지 2백여년간 이렇게 하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발해는 흥기하여 자못 넓은 지역을 차지했다. 숙신, 부여, 고구려의 옛땅이 영토 안에 있고, 또 불열, 우루, 철리, 월희 등 여러 부를 복속시켰다. 남으로 신라와 인접하고 북으로 흑수에 이르렀으며 서로는 거란과 이웃하고 동으로는 바다에 임하여 지역이 사방 수천리 이상이나 되었다. 그러니 그 하늘이 낸 풍부함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발해는 물길의 옛땅에 있으면서 산,바다,숲,물에 나오는 이득을 독차지하여 남는 것을 내어 각국과 교역했다. (중략) 이 나라의 산물은 결국, 각국에서 진귀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발해는 각국과의 교통이 빈번하였다.화전민 얘기도 좀 납득이 안되는 얘기임.1. 60년대야 화전민 인구파악을 했나? -> 이미 6.25때 정부가 남하하면서 화전민들도 데려옴.2. 그럼 왜 파악이 늦었나? -> 6.25로 개박살났으니까. 한국의 거의 모든 행정이 60년대에 정비되기 시작하는데;3. 그게 그 지역의 행정 공백을 의미하나? -> 비합법적으로 산에 들어가 개별 화전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파악하는거랑 그 지역의 인구나 행정공백과는 아무 상관이 없음. 2026년 대한민국도 거리에 노숙자 몇명인지 정확히 모름. 그러니까 대포통장 같은게 만들어 질수 있는거지. 근데 그게 서울에 인구가 없고 행정이 비어있단 뜻 아니잖아?
미세민지님의 댓글
- 미세민지
- 작성일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지배층 소수이고 피지배층 다수는 여진. 거란족인거 아니었음??그래서 지배계층은 고려로 편입되고 피지배층은 그자리에 남아서 여진되고??
듭다님의 댓글
- 듭다
- 작성일
교과서에서 이렇게 배움ㅋㅋ
lllIIlllIII님의 댓글
- lllIIlllIII
- 작성일
예전엔 그렇게 배웠는데 지금은 좀 달라진걸로 암.여진 부락 인구 아무리 높게 잡아도 고구려/발해인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한데당나라에 끌려가거나 신라로 귀부한 고구려인 다 제외하더라도만주에는 고구려인이 여진인보다 훨씬 많았음.말갈 다수설은 <유취국사> 에 일본 승려가 발해 답사하면서 "지배층은 고구려계로 소수, 피지배층은 말갈인 다수" 라고 쓴 기록에 근거하는데, 지금은 그 승려가 발해에 편입된 지 얼마 안됐던 말갈 지역을 답사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함.(발해는 고구려와다르게 말갈 7부 중 흑수말갈 1부 빼고 전부 정복해서 지배함)
남고소년님의 댓글
- 남고소년
- 작성일
인터넷에서 백두산 폭발한거라는 주장 봤었는데 신빙성 제로?ㅋㅋ
lllIIlllIII님의 댓글
- lllIIlllIII
- 작성일
전혀 미스테리 하지 않음.발해 멸망 이후 주변국으로 빠져나가거나 동화되면서 서서히 사라진거임오히려 발해인 정도면 정말 오래 정체성 유지한거임.고려로도 발해인 상당히 많이 내려왔지만거란에 항복한 발해인도 많았음.고려-거란 전쟁때도 고려측에서 싸우던 발해 왕족 출신 대도수도 있었고, 반대로 거란쪽에서 발해인 부대 지위하던 고청명도 있었음. (저 대도수도 패배 후 항복해 본인이 이끌던 발해집단과 함께 거란으로 끌려감)거란이 세운 요나라에서도, 그 이후 금나라에서도 '발해인' 자체가 주요한 피지배집단으로 남아있었고고위 문관, 장군 중에도 발해인 이름 심심찮게 보이는데다가 왕가에서도 발해 여자를 들여서요/금 황제 중에는 모계가 발해계인 경우도 있음.지배층은 이렇게 피가 섞여서 점점 동화되고피지배층은 집단 이주시키면 민족 하나 사라지는거 금방임. 근데 발해는 수백년을 버텼잖아.심지어 한참 후 몽골제국때도 발해인 정체성이 남아있었음<유합랄발도(유카라바투)는 발해인이다> - 원사 유합랄발도전<고휴의 자는 언해이니 발해인이다. 대대로 금에서 벼슬을 하였으며 조부인 고이가 상당으로 옮겨 거주하였다..> - 원사 권169 열전56발해인은 한순간에 사라진게 아니라,나라 망하고도 부흥운동 하면서 대여섯번 발해계 독립국 세웠었고,그게 수포로 돌아간 이후에도 요나라 밑에서도 반란 몇 번 일으켰음.요/금에서도 '발해인' 이라는 별도의 정체성 집단으로 남아있었고, 그 정체성이 길게는 몽골제국때까지 이어졌음.7세기에 세워져서 10세기에 망한 나라의 유민 정체성이 13세기까지 남아있던거임.충분히 오래 간거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