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중공군과 한군군에 관한 오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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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 인제터미널쌍둥이순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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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공군은 숫자로 밀어붙이는 무식한 군대였다?

구분

유엔군/연합군(UNC)

중공군

전투 지상군 규모

약 42.5만명(미군 약 17.8만 포함)

약 30만명

편제/구성

6개 군단급 HQ(미 3 + 국군 3), 18개 사단급 전투부대(국군 10 + 미군 7 + 미 해병 1) + 연합 여단 3 + 공정연대 1

1개병단(21개사단)

기동·보급(작전 지속력)

대규모 물자/보급 체계 구축 능력

도보위주, 현지징발식 보급체계

통신·지휘 방식

무전/참모체계 기반의 현대식 지휘가 강점(일반적으로)

나팔/취주(버글) 신호, 야간 기습·침투를 적극 활용

 

결론부터 말하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임.

 

절대적인 숫자우위는 그렇게 크지 않았고,

 

하지만 중공군은 필요한 곳에 인원을 몰빵한다는, 나폴레옹 시절부터 내려오던 기본기에 굉장히 충실했고, 그래서 직접 상대하는 병사들 입장에선 우리는 1개 대대(400명)밖에 없는데 상대는 한개 연대(1200명)이 돌격해오는 광경을 계속 겪다보니 그런 인식이 생김

 

 

 

 

2. 중공군은 정예병으로 이루어진 군대였다?

 

 

이말도 반은 맞고 반은 틀림

 

초창기도 국공내전 출신의 정예 병력은 절반 정도고 나머지는 국민당 출신의 총알받이였음.

 

그리고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숙련병 수급은 어려워져서 질적하락이 심각해졌고, 이게 결국 말기때는 큰 문제로 다가옴

 

 

3. 국방군(한국군)은 굉장히 못싸웠다?

 

이말도 반은 맞고 반은 틀림

 

초기에는 서부전선에서의 졸전

 

중기에는 중공군에게 약군으로 인식되어 집중적으로 노려졌던점

 

후기에는 현리전투를 비롯한 대패들로 인해 약군으로 인식되었는데, 

 

미군식 훈련을 받고 미군장비를 지원받은 화력 좋은 군대가 아시아권 보병들의 공격정신을 가진 어떻게 보면 완성형 군대였었음.

 

Compared with the beaten and dejected force of May 1951, the Korean soldier of 1953 could look up to trained, disciplined, and courageous officers.-

 

'1951년 5월의 패배와 실망에 비하면, 1953년의 한국군 병사들은 잘 훈련되고, 잘 통솔하며, 용기있는 장교들을 존경할 수 있었다.'

 

 

The KMAG report continued, "it is notable that hard-hit ROK Army units continued to inflict heavy casualties upon the attacking forces."-

 

'KMAG(주한미군사고문단)은 "심각한 피해를 입은 한국군이 지속적으로 적의 공격부대에 피해를 입힌 것이 눈에 띈다." 라고 보고했다.'

 

The ROK divisions kept this constant counterpressure on the enemy for over ninety-six critical hours. Even when forced to retreat, Korean officers maintained control of the men and reestablished defensive positions at the earliest opportunity to resist successfully Chinese exploitation efforts.-

 

'...한국군 사단들은 96시간 이상 적에게 지속적으로 반격을 가했고, 퇴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한국군 장교단은 병사들을 통제하여 중공군의 공세에 저항할 수 있는 방어진지들을 재편했다.'

 

미군도 후기에는 국방군은 방어선의 구멍이 아니라 한번 뺏기면 계속해서 반격하는 끈질긴 군대로 평가했고

 

 

南朝鲜军在作战指挥上虽受美军统一控制,但其基层部队并非完全依赖美军。其步兵分队具有一定的独立作战能力 후략...

 

 

 

미군과 국방군의 전술은 모든 군사작전이 미군의 지휘 하에 실시되고 있기 때문에 동일하다. 그러나 국방군은 미군보다도 우세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 국방군의 분대와 소대는 독자적인 전투행동을 전개할 수 있다. 그들은 백병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 국방군 다음으로 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 부대는 미군 흑인들이다.

 

 

미군은 주로 도로에 연하여 작전하며 차량으로 이동하고 도보 이동은 좀 처럼 하지 않는다. 전투행동 수행이 어려워진 지역은 국군에게 양도한다.

 

南朝鲜军的班、排在山地防御与反冲击作战中,常能脱离上级直接指挥,自行组织战斗。

 

남조선군의 분대와 소대는 산악 방어 및 반충격 전투에서, 상급의 직접 지휘에서 벗어나 스스로 전투를 조직하는 경우가 흔하다.

 

중공군 또한 국방군을 끈질기고 거친데다 유기적으로 싸울 수 있는 군대로 평가했음.

 

특히 (노획한)따발총과 카빈으로 무장하고 수튜탄을 20개씩 던져대면서 방탄복을 입고있어서 죽지도 않는 국방군 유격대의 야간 돌격을 굉장히 무서워 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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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3

SysG님의 댓글

  • 15 SysG
  • 작성일
유저 개드립까지 갔는데 어째 댓글이 없네요...

네모필라님의 댓글

  • 31 네모필라
  • 작성일
막줄은 무슨 레포데 네임드 좀비 설명같은데 ㅋㅋㅋㅋㅋㅋㅋ

머신스피릿은죽지않는다님의 댓글

  • 52 머신스피릿은죽지않는다
  • 작성일
마왕님!! 성 외곽에 슬라임을 머리에 얹은 미친년이 개를 타고 이상한 뜨거운 물을 끼얹으며 여기로 달려옵니다!!- 난나잉의 '이세계에서 전생을 최소한 사람으로 좀 해라' 중

47교장님의 댓글

  • 14 47교장
  • 작성일
중공군 카누잉 하고싶어요

인제터미널쌍둥이순대님의 댓글

  • 18 인제터미널쌍둥이순대
  • 작성일

47교장님의 댓글

  • 14 47교장
  • 작성일
이미 8년 꼬라박앗어요

인제터미널쌍둥이순대님의 댓글

  • 18 인제터미널쌍둥이순대
  • 작성일
대위면 중사ㄱ, 중사면 우리 여단에 재입대 3번한 양반 있더라.

47교장님의 댓글

  • 14 47교장
  • 작성일
특전 대위인데 안해요

오늘도잘살자님의 댓글

  • 55 오늘도잘살자
  • 작성일
으으... 6.25 당시 국군들은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을까.

김프로님의 댓글

  • 12 김프로
  • 작성일
현리전투 < 이게 진짜 존나 크긴 컸음..오죽하면 미군이 빡쳐서 지휘권까지 다 가져갔겠음

인제터미널쌍둥이순대님의 댓글

  • 18 인제터미널쌍둥이순대
  • 작성일
유재흥 스트레스 많이 받을꺼야

귤에붙은하얀그거님의 댓글

  • 16 귤에붙은하얀그거
  • 작성일
요약: 반은 맞고 반은 틀림

개미굴님의 댓글

  • 19 개미굴
  • 작성일
ㅋㅋㅋ

하라쇼님의 댓글

  • 26 하라쇼
  • 작성일
인해전술: 죤나 재밌음사실 인해전술 아니었음: 지루하고 따분함

메리제인님의 댓글

  • 16 메리제인
  • 작성일
아무래도 전장의 주도권을 쥐고 공세를 하는 쪽이 전장을 선택 할 수 있으니 어디로 올지몰라 병력을 뿌려 놓아야하는 방어측보단 집중하기도 용이하지

니소그님의 댓글

  • 54 니소그
  • 작성일
이것도 여러번 돌아다니는 내용인데30만명은 1차임이후로 계속 투입해서 70만 80만 단위로 들어옴인해전술은 맞고, 무식하게 병력으로만 밀어붙였다가 아닐 뿐임

4829571님의 댓글

  • 20 4829571
  • 작성일
1951년 ~ 1953년 중공군 병력 추정치1951년 6월경: 중공군은 약 277,000명의 병력이 한국에 배치된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만주 지역에 예비 병력 358,000명을 포함하면 총 635,000명 규모였습니다.1951년 7월 (휴전 회담 시작 시점): 이 시기 이후 전선은 교착 상태에 들어갔으나, 병력은 지속적으로 유지되거나 증강되었습니다.전쟁 기간 동안 최대 병력: 전쟁 기간 동안 총 290만 명에 달하는 중국군 병력(지원 인력 포함 시 300만 명 이상)이 순환 배치되었으며, 한 시점에 최대 약 135만 명의 병력이 한국에 주둔한 것으로 추정됩니다.1952년 12월: 미군의 상륙 작전을 우려한 중국 지도부는 1군, 16군, 21군 등 신규 병력을 한국으로 증파했습니다.1953년 여름 (휴전 직전): 휴전 직전 중공군의 총 병력은 약 135만 명에 달했습니다. 이는 19개 보병군단과 다수의 포병, 공군, 철도 공병 사단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요약하자면, 1951년 중반 이후 중공군은 지속적으로 병력을 유지 및 증강하여 휴전 직전에는 약 135만 명의 최대 병력 규모에 달했습니다. 월별로 정확히 몇 명이 투입되었는지를 알려주는 단일하고 신뢰할 수 있는 자료는 찾기 어렵지만, 전쟁 후반기로 갈수록 전체 주둔 병력은 증가하는 추세였습니다.전투병력 100만 넘었던걸로 알고있는데 30만 아닐걸?

Elco님의 댓글

  • 39 Elco
  • 작성일
Ai 딸깍 해서 이상한 자료 만든거 같음 ㅋㅋㅋ

인제터미널쌍둥이순대님의 댓글

  • 18 인제터미널쌍둥이순대
  • 작성일
AI딸깍은 맞고(표로 정리된 자료가 없어서) 내가 수치를 반격기준으로 달라고 해서 1차병력만 찍힌것도 맞음.근데 30만일때도 밀렸으니 한잔해

외선순환열차님의 댓글

  • 16 외선순환열차
  • 작성일
중국군 초반에 저정도지 총 투입된 인원은 200만명 이상아님?

Elco님의 댓글

  • 39 Elco
  • 작성일
인해전술이라는 말이 나왔던 50년대 후반 기준르로 비교해야지, 벤플리트 이후 미군 대규모 투입 및 국군 재편성이 완료된 53년 시점 총 인원으로 비교하는건 말이 안되지.

핸드폰분실함님의 댓글

  • 14 핸드폰분실함
  • 작성일
핸드폰분실함14 일 전[삭제 되었습니다]

호선노선도님의 댓글

  • 27 호선노선도
  • 작성일
ㅋㅋㅋ그렇네

안흥찐빵님의 댓글

  • 23 안흥찐빵
  • 작성일
중국인민지원군 꺼라위키 보면1950년 10월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에 들어와 조선인민군의 우군으로서 6.25 전쟁에 참전한 중화인민공화국의 군대.1950년 10월 19일 한반도에 처음 진입한 이래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총 병력 약 240만 명 이상 참전하였다. 이 가운데 전투 중 사상자는 전사자 18~20만 명을 포함해 약 36~40만 명, 질병이나 사고 등으로 인한 사상자를 의미하는 비(非)전투 사상자 38~ 4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라고 함

나의작은올리브나무님의 댓글

  • 21 나의작은올리브나무
  • 작성일
좀 헷갈리게 보일수 있는데 1차 30만, 최종 200만까지 보는 게 맞음. 다만 200만 인해전술이 아니라 30만 인해전술로 보는 게 맞긴하지.인해전술은 실제 인력이 각 전장당 많은것도 일정부분 사실이지만 대부분은 심리전과 v자포위 기동전술이 잘 맞아서 생긴 것이니까 당시 몇명의 중공산 육고기들이 쳐들어왔는지는 사실 그리 크게 중요한 부분이 아님. 그걸 말하고 싶은 글이겠지.un(이라고 쓰고 미군)이 방심했던것도 너무 크게 작용했고. 어쨌든 중공군 새끼들 때문에 개지랄씹창나서  아직도 위에 북돼지새끼와 좀비들 두고 사는 것 맞으니까 중국놈들이 항미원조 이 지랄할때마다 처패죽이고 싶은건 한국인이면 당연한 얘기 맞음. 마치 일본인들과 원종단이 대동아공영권 어쩌구 식민지발전론 어쩌구 할때마다 패죽이고 싶은것과 마찬가지니까.

인제터미널쌍둥이순대님의 댓글

  • 18 인제터미널쌍둥이순대
  • 작성일
이 의도로 썻는데 내가 글을 더럽게 못썻음

핑그르르님의 댓글

  • 22 핑그르르
  • 작성일
전부터 이런 글 올라오면 썼지만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현대화된 군대가 돌파를 보병 뿐 아니라 포병과 기갑 등을 활용하는 것과 달리 순전히 인력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인해전술로 부를 수 있는 것.

게이목욕씬님의 댓글

  • 16 게이목욕씬
  • 작성일
이글도 반은 맞고 반은 틀린네 레전드네

핑그르르님의 댓글

  • 22 핑그르르
  • 작성일
1. 그리고 1번 째 표에선 총 병력만 갖고 비교하는데, 중공군 1차 공세, 2차 공세 당시 병력 배치 상태를 따져야 함.중공군의 개입 전, 미국은 종전이 가시화되었다 판단하고 일부 병력을 후방에 놔뒀다가 중공군 개입으로 전황이 급변하게 이들을 전선으로 올려 보냈고, 국군 신편 사단들은 후방에서 교육훈련 및 대반란전 수행 중이었다가 51년도부턴 전선으로 콜업되었는데, 위 표는 이들을 마치 전선에 배치된 것 마냥 오해하게 만들 수 있음.중공군 1차 공세의 경우 서부전선으로 국한된 제한 공세였다는 점에서 실제 병력 차가 심하게 벌어짐. 서부전선의 유엔군과 국군은 6개 사단(미 24사단, 미 1기병사단, 국군 1, 6, 7, 8사단인데 실제 전투 배치는 5만 명 가량)만 배치되어 있었던 데 반해 중공군은 서부전선에 집중되었음. 더욱이 최근 연구에서 중공군의 사단 편제가 공산권 특유의 속 빈 강정이 아닌(1만 명 이하 편제) 최대 편제(1만 명 이상 편제)였기 때문에 투입 병력은 12~15만 명 가량임. 그마저도 입북 병력이 추가된 시점에선 29만 명 이상으로 불어났음.

인제터미널쌍둥이순대님의 댓글

  • 18 인제터미널쌍둥이순대
  • 작성일
참고한 자료가 18년도에 ai딸깍 너무 대충해서 숫자가 크게 안맞았었네그래도 반격을 제대로 못막은 원인은 안일한 판단으로 병력을 너무 넓게 배치한거였는데, 지금 적어준 내용에 따르면 기존 1.2~.15배에서 3배차이로 벌어지니, 어쩌면 인해전술이 맞을지도

핑그르르님의 댓글

  • 22 핑그르르
  • 작성일
2. 중공군 2차 공세 때는 유엔군도 후방의 병력을(미 9군단, 1차 공세 대응 시 이미 올라감) 올려 보냈지만, 공산군도 중공군 추가 입북 & 북한군도 급히 재건한 병력을 토대로 증강됨. 당장 장진호 전투에서 미 1해병사단이 상대한 적 전투서열만 보면 야전군급 1개가 달려들었는데 뭐... (그 대가로 중공군도 그 새로 투입된 9병단이 피해가 커 한동안 전선에서 이탈했지만) 단, 이 전투에서 유엔군과 국군이 패전한 건 동서간 공백지대가 문제였으니 인해전술 따질 계제는 아니므로 생략.

핑그르르님의 댓글

  • 22 핑그르르
  • 작성일
3. 중공군 3차 공세(신정 공세) 때는 재건된 북한군 십 수 개 사단이 투입되었던 걸로 기억함. 이 전역도 유엔군과 국군의 전투태세가 불비하고 전선도 구멍숭숭 바람송송이라 '축차진지상으로의 퇴각'이 답이었으므로 굳이 인해전술 따질 상황은 아님.단, 유엔군이 정신 차리고 반격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역공세를 목표로) 개시한 중공군 4차 공세 때는 중공군 2개 야전군 급(이하 '병단')이 새로 투입되었었음. 본문에서 중공군의 병력 손실로 국민당군 출신 얘기가 언급되지만, 4차 공세 전 입북한 3, 19병단에는 수 만 명의 고참병이 있었음. 더욱이, 최근 연구에 따르면 중공군은 한반도 개입을 조기에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투입 예정의 부대들에 대한 전력 강화가 이뤄진 상황. (앞서 언급한 1만 명 이상으로의 편제 강화도 같은 이유)그리고 일점 집중이네, 수적 우위네... 뭐 당연한 얘기긴 하다만... 중공군의 인해 전술은 2배, 3배 할 상황이 아님. 4차 공세 시, 중공군의 주공이었던 횡성 방면에서 라운드 업 작전을 수행 중이던 미 10군단은 휘하에 미 2개 사단과 국군 3개 사단을 두고 있었던 데 반해 이 방면에서 뚫고 서부전선의 옆구리를 노리는 공산군은 무려 6개 군단을 쑤셔 박았음. 병력 차는 7배. 중공군이 횡성은 뚫고, 정작 지평리에서 미 23연대전투단에게 주저앉는 바람에 우리가 살아남은 거지. 아, 근데 그 지평리에서도 중공군은 1개 연대전투단 잡겠다고 4개 사단을 꼬라박았었음.

핑그르르님의 댓글

  • 22 핑그르르
  • 작성일
4. 중공군의 1951년 춘계 대공세(5차 공세, 5차 공세 2단계 작전)에 이르면 병력 차는 절정에 이름.이 시기 일점집중 하겠답시고 병력 쑤셔 넣었을 때 상황과, 그 결과는 아래와 같음.(1) 5차 공세 당시, 파평산 일대에선 국군 1사단과 영연방 29여단을 노리고(서부전선 옆구리를 터뜨리고 서울을 재점령하는 것이 목표) 투입된 공산군 주공은 중공군 1개 병단 + 북한군 1개 군단이었음. 병력 차이는 무려 10배.→ 압도적 수적 우위를 기반으로 밀어내는 바람에 영연방군 글로스터셔 대대가 무너지는 상황도 있었으나, (심지어 인접 전선에선 국군 6사단이 다른 중공군에게 사창리에서 패전해버리면서 빵꾸를 내버렸고) 오히려 병력이 지나치게 밀집하는 바람에 국군 1사단과 영연방 29여단의 축차 방어 + 화력 집중에 녹아버렸음.(2) 5차 공세 2단계 작전. 그 유명한 현리 전투. 주공을 동부전선으로 돌린 중공군이 국군 (국군 3군단 + 미 10군단에 배속된 국군 2개 사단) 잡아먹겠다고 6개 군단을 꼬라박았음.본문에서는 1개 대대가 1개 연대를 상대하는 얘기를 했지? 돌파 구간에 있던 국군 7사단은 1개 대대 당 1개 사단을 상대하는 상황에 처했음. 당연히 속절없이 밀려났음.→ 국군 5, 7사단 멘탈 터뜨리고 국군 3군단 궤주시키기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주공 부대의 중공군 일부가 벙커고지 일대로 방향 잘못 잡고 꼬라박는 실책 + 포위망 우익의 북한군은 국군에게 막히는 바람에 3중 포위고 뭐고 일본군 대본영 도화지 찢어지듯 조져버렸음. 게다가 대병력을 쑤셔박은 탓에 중공군 각 제대의 물자는 순식간에 바닥이 났고, 단 며칠 만에 물자가 바닥난다거나, 심지어는 공세를 포기하고 후퇴하는 상황까지 벌어짐. 공세종말점에 이른 것.

핑그르르님의 댓글

  • 22 핑그르르
  • 작성일
5. 사람들이 중공군의 작전술 능력을 평가할 때 자꾸 잊는 것이 있는데...우회 기동이 가능했던 이유는 중공군 개입 초기 유엔군과 국군이 서로 부대 간에 연결을 제대로 하지 않다 못해, 심지어는 동서 간 공백지대까지 크게 남겼으니 잠복하고 파고들 공간이 많았음. 대표적인 사례가 중공군 2차 공세 당시 국군 2군단의 패전임. 당시 2군단의 우측방, 나아가 서부전선 전체가 우측이 뻥 뚫려 있었음. 중공군은 그곳을 노려 병력을 몰래 집중시키는 데 성공, 이후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에 대한 역공세를 펼쳤고, 나아가 유엔군 전선 자체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함.하지만 유엔군이 그에 대한 답으로, '부대 간 연결'을 중시하면서 구멍을 메꾸자, 공산군은 가장 약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쳐서 돌파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꿈.문제는 중공군은 전선 돌파에 필요한 차량, 포병, 기갑 모두 부족했음. 공격준비사격은 제한적이었고, 기갑은 춘계 대공세 끝나고 나서야 제대로 운용되었음. 현대전에서 기동전을 구사할 수단이 없는데 뭘로 기동전을 한 것이었음? 그저 인력이었던 거지. 돌파도, 침습도, 마비도, 기동도 오로지 사람 수로 밀어 넣었으니 '인해전술'이라 할 수 있는 것.

인제터미널쌍둥이순대님의 댓글

  • 18 인제터미널쌍둥이순대
  • 작성일
이건 직접쓰고 개드립가야하는데

인제터미널쌍둥이순대님의 댓글

  • 18 인제터미널쌍둥이순대
  • 작성일
이건 내가 글을 잘 못써서 설명 못한것도 있는데본문에서 설명할려고 했던 내용은 그냥 많은수를 정면으로 꼬라박은게 아니라, 보병기동을 적재적소에 잘 시켜서 일점에 몰아넣었던걸 설명하고 싶었었음.일반일들은 그런거 잘 모르니까그리고 기동로 극히 제한된 한반도 북부 산간지방에서 군단단위 제대를 우회기동시킨것도 개쩌는 거라 그냥 사람이 많아서 많이 꼴아박았습니다. 수준이 아닌 이씨발놈들은 멀쩡하게 굴러갈때 산악행군으로 포위섬멸시도하고 성공할뻔한 미친놈들입니다. 라는걸 설명하고 싶었음.맥아더랑 알몬드가 욕심 처 부려서 망한 면모도 있지만 이미 잘 알고있는 사실일테니 생략하겠음.

bisarro님의 댓글

  • 26 bisarro
  • 작성일
중공군 전법은 구대전법이라고 하는데 중공군 스스로는 기동성이 중요하다고 했다고 하는데 이걸 경험한 한국군은 인해전술로 보고 물량+화력을 중시하게 됨

부르기어려운닉네임님의 댓글

  • 23 부르기어려운닉네임
  • 작성일
김일성 개씨발새끼 민족의역적새끼

낮에나온반달님의 댓글

  • 24 낮에나온반달
  • 작성일
팽덕화 군재도 고트인게 기술력의 차이를 야간기동,우회기동 컨트롤 존나하면서 미군하고 존나빨리 근접해서 화력 묶어버리고, 이속 늘리려고 취사도구 없애고 쌀자루 쳐먹으면서 기동하게함 ㅋㅋ결국 밴플릭트 스타일 무제한 화력전으로 컷치긴했는데 가난한 군대가 최신식 군대랑 다이뜨려면 어케해야하는지 잘 보여줌

민트맛초꼬튀김님의 댓글

  • 18 민트맛초꼬튀김
  • 작성일
GPT 복붙했니?

인제터미널쌍둥이순대님의 댓글

  • 18 인제터미널쌍둥이순대
  • 작성일
gpt가 썻으면 더 잘 썻을것

고선생님의 댓글

  • 20 고선생
  • 작성일
초반에 중공군이 막 밀고 내려올때 보면 한쪽으로 병력 몰빵해서 상대적으로 약한 국군을 몇배의 물량으로 뚜까패고 그대로 달려서 주력인 미군을 포위해버림... 그래서 미군도 괴멸 위기까지 몰리고 이런 패턴이 반복됨. 국군이 뭐 하루나 반나절이라도 버텨줘야 전황이 전달이 되고 미군도 대응을 할텐데 사이드의 국군이 몇시간만에 와르르 무너져버리니 미군은 자꾸 경고조차도 받지 못한 채 퇴로 끊기고 뒤통수 맞고...이러니 빡칠수밖에. 국군이 전투력이 올라온건 미군이 체계적으로 훈련시킨 병사들이 본격적으로 투입되기 시작한 1951년 중후반쯤이나 되서고... 그 전까진 개폐급에 가까웠지ㅋㅋ 암튼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병력이 많아서 인해전술이 아니고, 한곳에 집중해서 병력을 투입하고 화력의 열세나 보급의 열악함을 인명을 무자비하게 갈아넣는 걸로 땜빵해서 인해전술인거ㅋㅋㅋ 식량 1주일치 주고 하루에 50km 100km씩 기동 시켜서 수류탄 20개씩 주고 꼴아박는데 뭐ㅋㅋㅋ

군터오딤님의 댓글

  • 29 군터오딤
  • 작성일
중국놈들이 불법 개입만 안했어도 한반도 통일 됐다.. 그런데 그런 중국놈들이 미국 대항해서 우리나라 도우러 온거라고 지껄이면 피꺼솟 기분임